본문 바로가기

문장28

김남숙 에세이,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 나는 대부분 건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간간히 찾아오는 이런 사소하고 유치한 생활이 소중하다. 이런 사소하고 유치한 생활에 대해 편하게 떠들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대부분 그런 때에 나는 운동화를 구겨 신은 채 혼자다. 이 사소하고 유치한 기쁨을 나눌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서 나는 좋으면서 슬프다. (26p) 긴장을 줄이고, 생각을 줄이고, 마음 속에 자애로운 신이 있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내 마음 속 자애로운 신은, 결국 나에게 ‘너는 잘 수 없다. 그러니 기대하지 말아라.’라고 말해 주었다. 자애롭다고 생각되는 신은 내 편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 속 한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는 이상한 훈수를 둘 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한번도 듣기 좋은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13.. 2023. 12. 31.
구병모, 로렘 입숨의 책 사랑하는 딸, 네가 앞으로 어떤 세상에서 누구와 싸우더라도, 아빠의 마음이 항상 너와 함께한다는 걸 잊지 말아주렴. 죽음을 자초하지 말고, 자신이 지나치게 비겁해지지 않는 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모욕을 주는 자들을 섣불리 용서하지 않기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진심 없는 화해에 서둘러 응하지도 않기를 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세상은 너를 무너뜨리거나 해코지하기에 여념이 없을 테지만, 무엇보다 용기를 잃지 말기를. (pp. 123-124) 2023. 10. 12.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최은영)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몫’) 다희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서운하다,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나, 상처받았다, 예전의 다희라면 그렇게 말했으리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애정이 상처로 돌아올 때 사람은 상대에게 따져 묻곤 하니까. 그러나 어떤 기대도, 미련도 없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걸어 잠근다. 다희에게 그녀는 더는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 년’) 감옥에 있는 동안, 그리고 출소해 사회에 나온 후에.. 2023. 9. 24.
요조 산문, 만지고 싶은 기분 20 어떤 공포는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엄습한다. 87 "우리는 보통 마음이 몸에게 말하잖아요. 몸이 마음을 따라야 하고요. 그런데 달릴 때는 마음이 몸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 같아요. 반대죠. 그렇게 몸과 마음이 다 말하고 듣는 상호 소통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계속 마음의 말만 듣게 되면 우리는 피폐해질 거예요. 몸의 말을 마음이 제대로 듣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죠. 달리지 않는 상황에서도요." 126 벌은 춤을 춘다. 꿀을 발견하고 위치를 알릴 때 벌은 춤을 추며 말한다. 그렇게 꿀을 채집하며 옮기는 꽃가루 덕에 내가 먹는 과일과 야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 춤을 추어야 할까. 156 여전히 씩씩하게 호흡하는 사람.. 2023. 9. 14.
미지를 위한 루바토(김선오) 66 루바토가 표면적으로는 연주자 개인의 감정과 해석에 따른 표현 방식이지만, 사실은 역으로 연주자의 강박을 비우고 음악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에 발생하는 것처럼. 116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가장 괴로운 일 중 하나는 나의 존재와 유관하게 발생하는 고통들을 외면한 채 나의 글쓰기가, 나의 타자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되고는 했다. 123 우리는 모두 각각의 흉터를 가지고 있지만, 그곳이 가끔은 근원이 되는 상처의 형태로부터 이탈하여 마음대로 재탄생되는 곳이기를 바란다. 148 별은 우리를 지우지 않는구나 햇빛처럼, 다른 빛을 지우지 않고도 빛으로 남아있구나 2023. 7. 24.
육호수, 창으로 채우는 반쯤 사라진 꿈에 찾아가 꿈의 사라진 절반이 되어본다 더 무너질 것이 없는 방 벽에 맞추어 반듯한 가구들 찻장 속은 들여다보지 않기로 빛에 헐어버린 유령의 해상도를 더는 추궁하지 않기로 창문에 시선을 묻고 창으로 창을 메우며 끝없는 사랑의 사라진 끝이 되어본다 기다림 속이라면 나의 노래가 기다림에 스민 침묵이라면 이곳에서 안전하게 지워질 수 있다 지워지는 동안이라면 어둠을 잃으며 어둠을 닮아가는 꿈의 창가를 지킬 수 있다 나의 비밀이 나의 사실이므로 창을 타고 시간이 흘러올 때 나의 몸은 꿈의 반짝이는 미끼가 되고 나의 발꿈치를 꿰어 모으던 그림자의 미늘은 침묵중에 의심을 그친다 고요는 창에 비친 사물들의 시선에 스민다 그럼에도 유리의 비밀은 유리의 투명한 사실이므로 창을 창으로 채울 때 창은 창이 된다.. 2023. 5. 7.
안태운, 피서 마찰하는 것에는 보풀이 일었다 자주 스위치를 껐다 켰고 비누에는 균열이 생겼다 비나 내렸으면 그러나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파이프는 계속 뼈 소리를 냈고 하늘에는 버짐이 피어나고 있었다 너는 비틀어진 선로였다 그러니 이탈할 것 여러 번 다짐을 했고 면벽했다 여분의 무게로 나무는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자주 간섭했고 그러나 그것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출구가 전환되고 있었다 청과점 앞에는 아지랑이가 오래 정체했다 네 동공은 우주 같았고 그러나 빈 우주에서 나는 독백하는 배역을 맡았다 또 한 편의 여름이 재생되었다 나는 일상을 적지 않았다 2023. 1. 30.
화해와 불평등(이근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컵으로 물을 마셨다 한 방울도 새지 않았다 물은 화해도 불평등도 모른다 손과 손가락이 따로 없으니 엉길 수가 없다 지금 나의 호흡은 뜨거운가 당신의 입술에 도달했는가 궁극의 평화는 귀로 오는 것 오늘 빗소리는 가릴 것이 많다 날씨는 예측할 수 없고 먼지는 새로 태어나고 항아리보다 먼저 뚜껑이 깨진다 이별과 만남을 이야기하는 세계에 희망은 참 많이 뜨고 진다 어둠은 평등한 이불인가 따뜻한가 여기저기 잠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꿈속에 발을 뻗는다 평등한 세계에서 잠깐 자유롭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그들을 다독인다 저마다 다른 자세로 서로를 덮는다 그게 사랑인가 2022. 12. 5.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있잖아, 폴." 그녀가 말한다. "가끔씩은 긴장을 푸는 것도 괜찮아. 그건 죄악이 아니잖아." "뭐가 죄악이 아니야?" "행복한 거."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그건 죄악이 아니야." 2022. 10. 6.
시와 산책(한정원) 18쪽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124쪽 저녁에는 묵독보다 낭독이 좋다. 내 입술 사이에서 나온 검은 글자들이 새처럼 어둑하게 날아가는 상상을 하며, 나는 시와 저녁이 잘 어울리는 반려라고 느낀다. 모호함과 모호함, 낯설음과 낯설음, 휘발과 휘발의 만남. 바로 그러한 특질 때문에 시도 저녁도 어려운 것인데, 어느새 나는 그것에 기대서만 간신히 살아간다. 뚜렷하고 익숙하며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음을 알게 되어서이다. 내가 즐겨 읽는 저녁용 시집은, 릴케가 만년에 10년에 걸쳐 쓴 「두이노의 비가」이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사랑하는 사람들이.. 2022.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