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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혐오와 디아스포라

by FROM_MJ 2022. 7. 17.

3학년_정시훈


   혐오는 미워하고 싫어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말로, 혐오를 유발하는 사람이나 사물, 혹은 상황을 마주칠 때의 두려움이 어떠한 태도나 행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원초적 혐오와 투사적 혐오는 공통적으로 특정 감각 경험에 대한 생리적 반응과 인지적 평가 과정을 복합적으로 거쳐 형성된다. 원초적 혐오란 유한성을 일깨우는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발현되는 감각적인 혐오로, 사회적 맥락에서 의도적으로 전개되는 투사적 혐오와는 다르다. 원초적 혐오가 투사적 혐오로 변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감정이 사회의 문제로 심화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소수자인 혐오 대상을 그 자체로써 문제가 있다고 보며, 집단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엮어 비주류 집단으로 전락시키는 사회적 행동인 것이다. 따라서 원초적 혐오는 생존과 본능에 연계하여 법의 적절성을 인정 받았지만, 투사적 혐오는 발생할 일이 없는 정당화가 불가능한 전염성의 무자비한 행위라는 점에서 초래된 두려움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혐오와 역사가 깊은 아프리카의 디아스포라가 있다. 디아스포라는 자신의 문화 근거지를 떠나 유랑하는 존재이며 망명하는 존재라는 의미로 흑인들의 혐오 일대기와 관련이 깊다. 이들은 유럽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원초적으로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비문명적이며 야만적이라고 보는 서구의 시각 때문에 순수한 영혼들은 악마라고 핍박받으며 심지어는 백인들의 돈벌이와 노예로의 변질된 삶을 살아온 것이다. 당대의 유럽인들은 이들을 투사적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들을 정당화시켰다. 그 와중에 이 아프리카의 영혼들은 끌려간 외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글로 기억을 남기는 디아스포라의 열정에 심취하였고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키게 된다. 혐오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모순적인 순간이 탄생한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자유를 느낀다는 가오싱젠의 말처럼 그들은 혐오를 예술로 승화시키며 현대에 이르러 인정받는 제3의 연대 의식, 즉 인종과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망명과 혐오의 불가분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해결하게 되었고, 오늘날 문학의 권위있는 상이나 인물들이 모두 흑인계열의 망명의식 작가라는 점에도 크게 기여한 것이다.
   혐오 표현은 개인, 집단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체를 이용하거나 선동을 통한 배제와 처벌을 통해 해악을 끼친다. 그러면 혐오를 규제할 방법이 없는 걸까? 그 해답은 법적 규제와 형성적 규제로 나뉜다. 법적 규제는 말 그대로 민·형사상 법과 국제 조약을 통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와 달리 과거의 흑인들에게는 인권과 법적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혐오를 퇴출시키는 형성적 규제의 성격으로써 본인들의 권리를 차츰 찾아 갔다. 대표적으로 그들은 ‘대항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아프리카계 미국 작가들에게서 가장 활발히 표현되었으며 유대인의 방랑적 디아스포라와 달리 노예로서 망명하던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라는 장르를 만들었다. 최초의 망명의식 작가인 에퀴아노의 노예에서 일반인이 되기까지의 인생사부터 토니 모리슨의 흑인으로서의 비극을 담아낸 ‘beloved’까지. 흑인의 유목적인 디아스포라는 부정적인 제국주의와 근대를 극복하고 포용하는 초월근대적 전략인 것이다. 예술을 이용한 대항 표현과 유대인의 방랑적 디아스포라 즉, 반랑하는 문화가 아닌 서구 제국에 부딪힌 그들만의 대항이자 문화였다.
   최근에는 집단을 표적으로 하면 집단모욕죄, 대중 선동을 목적으로 하면 대중선동죄, 그리고 범위에 상관없이 소셜 네트워크 집행법이란 법적규제를 활용하는 방안이 생김에 따라 흑인 같은 소수자들의 인권이 점점 향상되고 있다. 또한 국내에서도 혐오에 대한 규제와 입법조치를 요구로 하는 상황들이 펼쳐지면서 더 나은 3세계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혐오와 디아스포라의 관계성을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디아스포라는 근대성의 산물인 동시에 근대의 모순과 한계가 극복되는 공간으로써 혐오를 온몸으로 경험한 집단이 해방성을 지니고 근대의 부정 요소를 타파하려는 ‘타자의 근대성’이 발휘된다는 점에서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지만 그들은 폭력과 혐오에 상실감을 느끼고 글쓰기와 같은 계몽의식으로 이겨내고자 하였으며 아프리카의 혈통이지만 미국인이라는 이중 의식을 긍정적으로 극복하였고, 더 나아가 연대의식을 지녀 민족의 경계를 초월하고 있다. 주어진 혐오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방안을 생각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지식인 같은 멋짐인가.
   따라서 우리는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서구적 시각을 버리고 세상을 더 넓게 바라봐야 한다. 성별, 세대, 인종, 지역을 구분하는 대중의 선동을 이용한 혐오 사회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그에 대한 반박은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라는 괴밸스의 혐오 선전 전략 체제는 현대에서의 정치 전쟁과 구별 전쟁에 활용되고 있다. 이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검열하는 자세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며 평등 사회의 마지막 해결책일 것이다. '대프리카', '흑형' 등 우리가 재미있어 하는, 흑인이 연상되는 이미지를 활용한 인종의 표현도 잘못된 방법이다. 흑인은 운동을 잘하고 힘이 쎄고 범죄자가 많다는 편향된 인식이 혐오를 불러 일으키는 원초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론적 관점을 가지고 겸허히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할 때 혐오는 더 없어질 것이고 매체를 통한 가난한 이미지일지라도 그들은 행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잣대로 행복과 부의 기준을 정하면 끝도 없는 평가 사회가 될 뿐이다. 선동과 자극에 이끌리지 않는 주체적인 자신이 되자. 문화를 넓게 보고 사랑하는 태도를 가지자. 전 세계 모든 차별이 사라지는 그 날을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김상률, 「디아스포라와 아프리카계 미국문학」(2004)

우분투 국제교육연구소, 「아프리카 인식제고 방안과 우리의 對아프리카 외교정책에 대한 함의」(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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